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재밌게 보고 있다. 매력적인 여성 인물들이 잔뜩 나오는 드라마라 애정을 갖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나오는 반응을 보면 그 중에서 세 자매의 첫째인 인주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가 많은 것 같다. 본 것 중에는 너무 순진하고 멍청해서 비호감이라고 하는 말도 있었는데 솔직히 멍청하고 순진한 여성 인물을 보고 이런 말 할 수 있는 게 더 비호감 아닌가... 게다가 인주는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서 똑똑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어떻게 비호감일 수 있지... 솔직히 그 말을 보고 화가 난다기보다는 신기했다. 어떻게 평범하고 겁많고 가난한 여자가 비호감이고 짜증날 수가 있지?
내 생각에는 인터넷에서 종종 보던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사람" 선망하고 질투하는 못난 여자들과 비슷한 인물이 모니터에 주동 인물로 재현되니 다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라하는 거 같다. 그동안 미디어에 나온 여성 주인공은 대부분 선하고 결함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인주는 딱히 선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결핍도 다 내보이니까. 돈을 갖고 싶어하는 이유에 가족의 행복을 위해 이런 숭고한 이유만이 아니라 자기가 멋진 구두를 신고 싶고 비싼 겨울코트를 뽐내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으니까. 돈 생기면 샷시가 잘 된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말은 가족을 생각한 거였지만 겨울코트 얘기는 자신의 욕망이 먼저 튀어나왔던 거다. 인주라는 인물 성격에 그동안 자신의 옷을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옷과 비교해왔을테니.(애초에 인주의 모델이 된 작은 아씨들 원작의 맏딸 메그가 그런 인물이다) 드라마 <클리닝업>도 비슷하게 돈을 위해 위법의 선을 넘는 이야기였지만 자식 부양과 가족의 안정이 주인공의 주된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좀 다르다.
인주의 공식 인물 소개에는 "남자들한테 좀 인기가 있다고 생각해서 결혼으로 집안을 일으켜 보려고 한 적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걸 읽고 생각난 것이 유명한 "산독기독기" 밈이었다. 그렇다 인주는... 산독기였던 것이다. 자기 입으로 계속 남자한테 인기 있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다고 말하는 게 딱 커뮤니티에 저런 글 쓸 것 같은 인물이 아닌가.(심지어 배우인 김고은은... 정말로 은교였다! 의도된 캐스팅일까?!) 모두들 이런 여자를 놀리기 바쁘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시청자가 이입하고 응원해야하는 주동인물이 되어버리니까 다들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
인주가 '가난은 겨울코트에서 드러난다'고 했던 대사가 속물 같다며 비판을 받았었는데 이런 주동인물은 항상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고 작가 본인이 반영된다고 생각하니까 인주가 하는 말들이 곧 작가의 생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인물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 분명함에도. 살인자가 주동인물인 미디어를 보면서는 작가가 사람 죽이고 싶구나 생각을 하는가? 작가의 생각이 아니라 해도 많은 시청자가 이런 대사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작가는 좀 더 신중하게 써야한다는 건 맞는 말이긴 한데 시청자들의 문해력을 작가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우영우> 때는 고래 관광은 나쁘다고 대놓고 말해도 다들 이해를 못하고 고래 귀엽다고 보러 가던데 어디까지 작가 탓을 해야하는 걸까? 작가는 현실에 있는 생각을 각본에 옮긴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산독기니 은교니 하는 글을 쓰는 것도 현실에 있는 여자다. 평소에 놀리고 조롱하던 여자가 주동인물 자리에 앉아 있으니 다들 적응을 못 할만도 하다. 하지만 미디어에서만이라도 그런 여자에게 관대해져보면 어떨까?
다시 인주 얘기로 돌아가보면 인경이 같은 정의롭고 강한 여성 인물은 비교적 많았어서 그런지 인주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거 같다. 그런데 인경이도 빌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말이 있던데...ㅎㅎㅎ; 오히려 인경이는 히어로 타입의 인물이 아닌가? 정의를 위해서 타협하지 못하는 인물이 어떻게 빌런이란 말인가. 자기 안위와 이익을 위해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게 오히려 빌런에 가깝지 않은가.
작은 아씨들의 세 자매는 모두 기존의 미디어에서 기대되던 여성상을 반대로 하고 있는 인물들이라 더 마음에 든다. 인주는 주인공이지만 완성형이 아닌 좌충우돌 성장형이고, 인경이는 굽히지 않고 앞뒤 꽉 막힌 질서선이고, 인혜는 언니들 말을 듣지 않고 귀염성도 없는 막내다. 그리고 나는 이 중에서 주인공이 인주라서 더 좋다.
인주는 처음에는 겁도 많고 자신의 문제가 아닌 걸 자기한테 돌리기도 하는 소심한 인물이었지만 가까운 인물의 죽음을 겪고 700억이라는 큰 돈이 걸린 판에 뛰어들면서 점점 대담하고 강해진다. 인주가 "게임 체인저"라는 평을 듣는 장면이 있는데 인주가 게임 체인저일 수 있는 건 오히려 바로 그 약지 못하고 순진한 부분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보통 그런 여자들이 판도를 뒤집더라고. 인주는 약하고 착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멍청한 약자들은 강약약강을 하며 강자에게 붙지만 인주는 약자에게만 약하고 강자한테는 재지 않고 들이받기부터 하고 본다.
인경이도 순진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지만 이 인물의 순수성은 정의감으로 표현되어서 언니와는 또 다른 유형의 인물이라는 게 좋다. 하지만 인경이가 주인공이었으면 그냥 괜찮은 여성서사1이었을 것 같다. 인주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독특한 서사가 된 거라고 생각한다. 오인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모든 논란을 뚫고 갈만큼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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